신앙 칼럼

희생 플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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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리안라이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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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단편 소설 "세계의 수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드리드에는 파코라는 이름의 소년들이 넘쳐납니다. 파코는 프란시스코의 애칭입니다. 마드리드에는 한 아버지가 마드리드에 와서 엘 리베랄 신문의 개인 칼럼에 "파코, 화요일 정오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 아빠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라는 광고를 냈다는 마드리드 농담이 있습니다. 그리고 광고에 응답한 800명의 젊은이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치안대(Guardia Civil)가 출동해야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의 파코를 찾았을까요? 헤밍웨이는 찾았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 800명의 파코 중 한 명인가요? 그렇다면 예수님을 바라 보십시요. 예수님께서는 억울하게 고발당하시고, 조롱당하시고, 매를 맞으시고, 굴욕을 당하셨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그분을 해골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끌고 가서, 그분과 그 죄수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한 명은 오른편에, 다른 한 명은 왼편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헐떡이는 예수님은 고문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선고하셨을 수 있었습니다. 보복이나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셨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신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 제가 저들을 용서한 것같이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산헤드린 의원들을 용서했습니다.” “유대인들, 무리들, 빌라도, 헤롯, 제자들, 로마 군인들, 그리고 모든 파코들를 용서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그들을 용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모두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용서하실 수 있었을까요? 희생으로만 가능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열두 천사를 불러 구원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이 거룩한 희생으로 우리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 사람으로 호주에 살면서 가장 큰 문화 충격 중 하나가 서양 사람들의 “개인주의, 이기주의”일 것입니다. 제가 어느 호주 청년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에 대해 얘기하니까 자기는 “희생”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혹시 호주에서 자란 우리 자녀들도 똑같은 생각을 갖고 사는게 아닐까 싶어 걱정되었습니다. 


사전에 보니까, "희생"은 “다른 것을 얻기 위해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야구 경기에는 "희생 플라이"라는 규칙이 있습니다. 한 타자를 희생하면서 득점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3루에 주자가 있습니다. 타자가 중견수 방향으로 깊은 플라이볼을 칩니다. 중견수가 그 플라이볼을 잡습니다. (타자는 "아웃") 3루 주자가 태그업하여 홈으로 달려 득점합니다. 요약하자면, 타자는 "희생 플라이"를 치고 "아웃"되지만, 주자를 "세이브"하여 "득점"을 얻습니다.


1941년 2월, 가톨릭 사제 콜버가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습니다. 그해 7월, 감옥에서 탈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탈출자 한 명당 열 명의 수감자를 죽이는 가혹한 처벌이 있었습니다. 친위대 장교가 열 번째 사형수 이름인 "가요브니셰크"를 부르자, 그는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내 아내와 내 아이들..." 이때, 콜버는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장교는 그에게 멈추지 않으면 총으로 쏘겠다고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사제는 "지휘관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쏘지 않은 것은 정말 기적이었습니다. 


콜버는, "지휘관님, 저는 이 젊은이 대신 죽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내도 자식도 없습니다. 게다가 저는 늙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의 몸 상태가 훨씬 좋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지휘관은 "승낙"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가조우니체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눈으로만 그에게 감사를 표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멍하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살고, 다른 누군가가 기꺼이, 그리고 자발적으로 저를 위해 목숨을 내어준다는 사실 말입니다. 낯선 사람 말입니다!" 그의 뒷마당에는 그가 직접 손으로 새긴 명판이 있었습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 목숨을 바친 콜버에게 바치는 헌사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도 용서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희생을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선물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감사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도 진정한 희생을 알고 실천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골드코스트 선교교회 박갈렙 목사 0431 232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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